제1화 10월 26일 오후 3시
제2화 1년전 10월 26일, 운명의 시작
제3화 덫에 걸린 네 남자
제4화 그래, 나 된장녀다!
제5화 빠릿빠릿한 놈
제6화 한국에서 패션녀 되기
제7화 탈출 작전
제8화 황제노래방 습격사건
제9화 여우와 늑대의 머리싸움
제10화 예언자 A맨
제11화 최종 점검
제12화 혜라의 무너진 왕국
제13화 작전 개시
제14화 피코방정식
제15화 임무 완료
제16화 어설픈 파티는 끝났다
제17화 네가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제18화 10월 26일 저녁 7시(완결)
<경국(驚國)된장 홍가연>
제작 : 앤디킴
원작 : 앤디킴
제10화: 예언자 A맨
- 4개월 전 -
“이번 정차할 역은 수유, 수유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수유역을 알리는 전철 안내 방송이 나오자 가연은 피코를 데리고 내릴 준비를 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8시 반이었다. 여기서 북한산 우이령길까지 가려면 다시 택시를 타야 했다. 피코가 준 정보에 따르면 A맨이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저녁 10시에 맞춰 도착해야 한다고 했다.
차가 정차하고 문이 열렸다. 가연은 피코의 팔을 잡아주며 지하철 문틈에 발이 끼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수유역에서는 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내렸다. 가연은 맨 먼저 내렸지만, 피코의 걸음걸이를 의식하고 문 옆으로 살짝 피해 다른 사람들이 먼저 지나가도록 해주었다. 간혹 지나치며 피코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지나갔다.
일단 가연은 피코를 데리고 벤치 의자 쪽으로 갔다. 그리고는 준비해 온 가방에 피코를 넣어서 어깨에 들쳐 멨다. 피코도 물론 계단을 올라갈 수는 있지만 걸음이 너무 느렸고, 어차피 밖에서 버스도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았다.
“어우, 너 왜 이렇게 무겁니?”
그러자 피코에게서 ‘딩동’하는 알림 벨이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피코를 업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메세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 그냥 사람처럼 음성으로 대화하면 편할 텐데......”
그녀는 피코를 업고 그대로 전철역을 빠져 나와 출구 옆 도로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택시를 잡아탔다. 뒷자리에 앉은 뒤, 피코가 든 가방을 벗어서 옆에 나란히 놓아두었다. 택시는 어둑어둑한 밤거리를 신나게 달려갔다.
요즘은 노래방 알바를 그만두어서 저녁시간에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가 있었다. 공기도 점점 시원해지는 것 같았고, 답답한 마음도 상쾌해졌다. 대학 때 MT 가는 기분과 비슷하기도 했다.
대로변을 시원하게 지나가던 택시는 우이동 유원지 입구로 들어서며 비탈진 언덕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주변에 대형 음식점들이 많아 산 속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몇 분 동안을 더 올라가자 더 이상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까지 도착했다.
그녀는 요금을 계산한 뒤 가방을 다시 들쳐 메고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피코를 꺼내서 길바닥에 세워 주었다.
“자, 여기서부터는 네가 안내해.”
그녀는 피코에게 당부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딩동’, ‘네,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피코는 이렇게 응답하더니 뒤를 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연은 주변을 살펴보며 그의 뒤를 천천히 쫒았다. 평일 밤이라서 그런지 차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도 인적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차량 통제 표지판 이후부터는 주변에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피코는 캄캄하고 울퉁불퉁한 길 위를 위태위태하게 걸어갔다. 북한산 바로 옆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공기는 시원하고 맑았다.
5분 정도 걸어가자 사람이 간신히 다닐 수 있을 정도 너비의 흙길이 나타났는데, 이때부터는 주변에 인기척이 전혀 없어서 가연도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방이 풀들이었다. 피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앞으로만 가고 있었다.
길을 가면 갈수록 주변은 정말 쥐 죽은 듯이 고요해 졌다. 시골길처럼 평화롭다고도 생각되었지만, 문득 갑자기 괴한이라도 튀어나온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아무리 소리쳐도 주변에 도와줄 사람은 하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슬슬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야, 피코, 이런 데 사람이 살고 있다고?”
가연은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걸어가는 앞서 가던 피코를 붙잡고 말을 걸었다.
피코는 깜짝 놀란 듯 가연을 잠시 쳐다보았으나, 곧 문자판을 반짝였다.
‘딩동,’ ‘네, 그렇습니다.’
“너, 아니기만 해봐.”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피코와 함께 길을 걸었다.
몇 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피코가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
‘딩동,’ ‘여기서부터 최단거리로 갑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흙길을 벗어나서 산속 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정말 야산에 들어온 것 같았고, 가연도 덜컥 겁이 났다. 산 속에 혼자 기거하는 낯선 남자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새삼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 녀석이 제대로 뭘 알고 날 여기까지 데려온 것일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여기까지 따라온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참을 더 올라가자 유독 나무나 잡초들이 없는 작은 평지가 나타났다. 가연은 순간 직감적으로 이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사람의 손길이나 흔적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작은 텐트 하나치면 딱 맞을만한 공간이었다. 피코 역시 그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딩동,’ ‘도착했습니다.’
가연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몰려오는 긴장감을 억누른 채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미 깜깜한 밤이었지만, 달빛이 비추는 자리를 따라 사물을 식별할 수 있었다. 달빛은 바로 옆에 있는 소나무 가지를 따라 평평한 땅바닥의 잔가지들을 비추고 있었으며, 약 3~4미터 전방에 가파르게 나있는 산 경사면의 흙과 바위까지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가연의 시선은 경사면 오른쪽 끝에 위치한 유독 검고 어둡게 보이는 바위에까지 갔다. 웅크리고 앉아있는 사람만한 크기의 검은 바위였다. 원숭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얼굴은 이쪽을 응시하는 사람의 모습, 아까부터 조금의 미동도 없이 저 자세로 그대로 있었다. 그때 바위의 머리 부분에서 사람 눈빛처럼 반딧불 같은 불빛이 반짝 빛났다. 그 순간 가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음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목구멍 끝에서부터 숨이 턱 막혀 아무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다리가 풀려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사람이다!
‘딩동’
그 순간, 갑자기 피코의 메시지 알림 벨이 울렸다. 가연의 심장은 밖에서 들릴 정도로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피코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꼼짝도 하지 못하고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피코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맨 오른쪽 바위가 출입구입니다.’
‘바위라고?’
그렇다. 가연이 응시하고 있던 것은 바위였다. 그녀의 등줄기에는 아직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일어났다. 아직까지 다리가 풀려 힘이 없었지만, 천천히 바위 앞으로 다가갔다. 앞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바위 뒤쪽에는 작은 동굴이 있었다. 어른 한명이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었다.
‘여기가 출입구인가?’
그녀는 몸을 숙여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짐승이나 살고 있을 것 같은 토굴이었다. 가연은 굴 안을 바라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세요?”
겁이 나서 목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크게 질러보았다.
“거기 누구 계세요?”
아무 기척도 없었다. 긴장감 속에서 정적이 흘렀고, 눈앞의 시커먼 동굴 안에서 갑자기 늑대나 살쾡이 같은 산짐승이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가연은 굴 입구에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피코를 쳐다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무도 없나본데?’
피코는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다가 ‘딩동’ 하며 메시지를 띄웠다.
‘안에 없다면, 평균 10시에는 돌아올 겁니다.’
가연은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9시 40분이었다. 잠시 뒤에 이곳에 사람이 온다고 생각하니 다시 심장이 쿵쾅거리며 겁이 났다. 하지만, 가연은 작정한 듯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끝장을 봐야지!’
그녀는 마른 땅을 골라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않았다. 그녀는 긴장 속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며 기다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정말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이세요?’라고 물어볼까? 밤늦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하다고 인사를 먼저 해야 하나? 고민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말하면......?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먼발치에서 부스럭하는 소리가 잠깐 들렸다. 가연이 지나왔던 길 쪽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다. 가연은 황급히 핸드폰 시계를 보았다. ‘9시 55분.’
조금 뒤에 다시 부스럭하고 연달아 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반복되는 걸로 봐서 무언가가 걸어가고 있는 소리 같았다. 아직 사람인지 산짐승인지 확실하게 분간이 안가는 상황이었다. 가연은 놀란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숨을 죽였다. 부스럭 부스럭하고 좀 더 확실하게 소리가 들렸다. 분명 무언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가연의 몸은 이미 경직되어 있었다. 온 몸의 신경을 귀에 집중시키며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소리는 조금씩 크게 들리면서 분명해졌다. 바로 그 순간 ‘저벅 저벅’하는 남자 어른의 발자국 소리를 똑똑히 분간할 수 있었다. 가연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 분명히 어떤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A맨인가?’
가연은 순식간에 불안한 걱정에 빠졌다. 만일 아니라면? 혹시 이 근처를 배회하는 다른 남자라면? 혹시 산 속에 숨어있는 지명수배자나 범죄자라면?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동안에도 발자국은 거침없이 가연을 향해 다가왔다. 이제는 벌써 10~20미터 정도 거리에 와 있는 것 같다. 가연의 온 몸은 후회와 공포에 휩싸였고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몸을 숨겨야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풀잎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남자에게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가연은 온 몸이 마비된 듯이 앉은 자리에서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남자는 바로 몇 미터 앞까지 도달했다. 달빛에 남자의 시커먼 그림자가 언뜻 비춰지는 듯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멈추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가연도 숨을 죽이며 기다렸다. ‘저러다 그냥 지나치는 걸까?’하고 기대를 해보았지만, 다음 순간 피코를 쳐다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 했다. 피코의 가슴에 있는 LED 불빛이 너무나 환하게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도 분명 이 불빛을 보고 걸음을 먼 춘 것이었다.
곧이어 발걸음 소리가 다시 바스락거리며 가연이 있는 풀숲 빈터 안으로 사람의 형상을 한 물체가 불쑥 걸어 들어왔다. 가연의 몸은 이미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있었고, 숨도 쉬지 못한 채로 두 눈만 똑바로 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달빛과 피코의 불빛으로 상대방이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란 사실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보통 체구에 마르고 호리호리한 모습이었다. 그는 역시나 처음부터 시선을 피코의 LED 쪽으로 향한 채 걸어들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가연 쪽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놀랍게도 그는 먼저 가연을 향해 이렇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예상외로 부드러워서 듣는 순간 가연의 경직된 몸이 마치 마법처럼 사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가연은 직감적으로 그가 자신을 헤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네, 네”
가연은 엉겁결에 이렇게 대답하며 계속 앉아있는 것이 민망한지 황급히 일어서려고 하였다. 하지만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머리가 어질해지는 것 같아 잠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리하게 일어나려다가 낯선 남자가 자신을 부축이라도 하려고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는 남자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그런데 남자는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피코 쪽으로 시선을 주며 혼잣말을 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피코군요.”
“아, 네. 네?”
가연은 깜짝 놀라며 남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런 가연을 바라보면서 다시 이렇게 얘기했다.
“그 쪽은 홍가연 씨?”
가연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 이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예언자인가? 우리가 여기로 올 것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혹시 A맨씨 맞으신가요?”
“예,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나요?”
“그게, 말하기 창피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분이라고 해서요. 만나 뵙고 제 고민도 얘기하고, 충고나 조언도 듣고 싶어서요. 너무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죠? 죄송합니다.”
가연은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 왜 A맨이 자기가 찾아 온 이유는 알지 못하는 지 의문이 들었다. 정말 모든 걸 다 안다면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전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제가 관심 있는 일에 대해서만 알 뿐이죠. 하지만 홍가연씨가 오늘 저를 찾아올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다면 도와드려야죠. 밤 10시쯤에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찍 오셔서 기다리셨군요.
“네? 저희가 올지 알고 계셨다구요? 어떻게요? 참, 그리고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는 거죠?"
가연은 그의 말을 듣자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해 놀란 눈을 하고 이렇게 물어보았다.
“날씨가 쌀쌀해지는데,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그는 뒤편에 있는 동굴을 가리키며 이렇게 얘기하고는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맨 처음 가연이 보고 놀랐던 그 동굴이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도 되나?’ 망설여졌지만, 가연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의 뒤를 쫒아갔다. 걸을 때마다 다리가 찌릿찌릿 저려왔다.
동굴 입구는 폭이 60센티미터 정도였고, 높이가 아주 낮아서 여자인 가연도 몸을 최대한 앞으로 구부리고서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몇 발짝 앞에서 가던 A맨은 아주 능숙하게 동굴 안을 비집고 들어가더니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더니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동굴 안쪽에서 환하게 전등 불빛이 켜지는 것이었다. 가연은 불빛을 쫒아 안으로 좀 더 들어갔다.
좁은 통로를 지나 안 쪽 공간으로 들어서자 몸을 일으켜도 머리가 닿지 않는 꽤 넓고 아늑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언뜻 보기에 가연의 원룸 방 절반 정도 되는 크기였다. 바로 맞은편 끝에는 나무로 만든 조그마한 책상과 책장이 있었고, 그 위에는 컴퓨터 모니터와 키보드가 위치해 있었다. 바로 옆에는 옷장으로 보이는 간이장도 하나 있었고, 입구 앞쪽에 아주 자그마한 원목 테이블과 의자 한 개가 놓여있었다. 바닥은 원목 나무 같은 것이 깔려 있어서 전혀 동굴 같지 않고 깔끔한 느낌이 들었다. 벽에 걸려있는 액자도 눈에 들어왔는데, 고흐가 그린 ‘고흐의 방’이었다. 방 한쪽 구석에는 박스가 여러 개 놓여있었다.
“와, 안은 전혀 다르네요. 여기를 직접 다 만드신 건가요?”
가연은 그에게 이렇게 질문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이는 대략 40대 초반 쯤 되어 보였다. 면도를 안 해서 수염이 덕지덕지 했지만, 산 속에서 혼자 사는 사람치고는 비교적 깨끗하게 보였다.
가연은 자신의 얼굴과 몸매를 힐끗거리는 대부분의 남자들의 눈빛과 표정에 익숙해 있었지만, A맨의 경우는 일반적인 남자들과 좀 달랐다.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무덤덤했다. 마치 너같은 정도의 미인은 주변에 수백명쯤 널려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화장이라도 좀 더 하고 올 걸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긴 원래 북한의 남파 공작원들이 사용하던 비트였습니다.”
“네? 정말요?”
“네, 1961년에 박정희를 암살하려고 북한공작원 서른 한명이 여기 우이령길을 지나서 청와대까지 들어갔었죠. 그들은 낮에는 이런 비트를 만들어서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이동을 하곤 했었는데, 아마도 여기가 그들이 만든 마지막 비트였던 것 같습니다.”
“아, 저도 들은 적 있어요. 김신조 사건 맞죠?”
“네, 맞습니다. 공작원들은 두 명만 빼고 다 사살되었는데, 한 명은 생포됐고, 한 명은 다시 북한으로 도망갔었죠. 그때 생포된 사람의 이름이 김신조였습니다.”
“아, 그렇군요.”
가연은 신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최근 들어 한국근현대사도 다시 공부하고 있던 터라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그는 테이블의 의자를 빼서 가연 쪽으로 내어주며 말했다.
“앉으시죠.”
“네, 고맙습니다.”
그녀는 의자를 테이블 앞 쪽으로 조금 당기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고 계셨어요?”
그녀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듯 A맨이 컴퓨터 의자에 앉자마자 이렇게 물어보았다.
“별거 아니에요. 뭐 겉보기는 이렇지만 여기서는 인터넷도 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아주 오래전에 앤디킴이 쓴 피코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읽은 적이 있죠.”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앤디킴이라면 피코를 설계했다는 디자이너를 말하는 것 같았다. 피코방정식은 피코를 움직이는 인공지능의 원리였다.
“그때부터 피코방정식으로 설계된 인공지능 로봇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피코의 첫 번째 주인이 누가 될지도 궁금하게 지켜봤었죠. 앤디원닷컴에서 베타테스터를 한 명 모집한다는 이벤트 광고도 봤구요. 홍가연씨 이름은 최종 선발된 베타테스터로 홈페이지에 지금도 올라와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알고 나니 조금 시시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어떻게 여기로 올 줄 알고 있었던 걸까? 그것도 오늘 밤 10시라는 시간까지 알고서.
“그럼 오늘 밤 10시에 올 거라는 건 어떻게 아셨나요?”
“피코의 인공지능은 웹기반이에요. 몸은 아가씨와 함께 있지만, 정신은 앤디원닷컴 본사 웹서버에 들어있죠. 그런데 지난주에 피코의 인공지능이 제 컴퓨터에 해킹프로그램 하나를 깔려고 하더군요. 물론 제 동의를 구하면서요. 제 컴퓨터의 로그인 기록을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거였죠. 그리고는 최근 3개월 동안 제가 인터넷에 접속한 날짜와 시간대 정보를 빼갔고, 빼갔다는 사실을 또 남겨놓았어요. 저를 만나러 올 시간을 정하려는 거였겠죠. 빼간 자료들을 확인해보니 제 컴퓨터가 켜지는 전체 평균시간대는 오후 2시인데, 편차가 너무 커서 쓸모가 없더라구요. 오후에 꺼지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요일별로 구분해서 보면 유독 월요일과 화요일 밤 9시 45분부터 10시 7분 사이에는 95%의 신뢰도로 컴퓨터가 켜지더군요. 아마 피코는 월요일이나 화요일 밤 대략 10시 17분에 오면 저를 만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거예요. 사실 어제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지 않는 걸 보고, 오늘 쯤 오겠다 싶었죠.”
가연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결국은 피코가 해킹을 통해 약속시간을 계산했고, A맨도 그걸 역으로 똑같이 계산해서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네, 그렇군요.”
“저기 있는 상자를 열어 보세요.”
그는 이렇게 말하며 가연의 뒤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던 서랍장을 쳐다보았다. 그 위에는 작은 나무상자 하나가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가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자를 테이블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천천히 상자 뚜껑을 열어보았다. 상자는 텅 비어 있는 듯이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밑바닥에 포스트잇이 한 장 붙어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내 들어보았다.
‘혜라의 왕국’
거기에는 이렇게 쓰인 글씨와 함께 인터넷 까페 주소가 적혀있었다. 분명히 지난번에 현주가 얘기했던 바로 그 텐프로란 곳의 이름이었다.
“그곳에 가서 일자리를 찾아보세요.”
그는 짧게 이렇게 대답하고는 마치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의자에 기대어 버렸다.
가연은 혼란스러웠다. 스스로 된장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뒤에 생활고에 허덕이다 노래방 도우미에 이제는 룸쌀롱까지 진출할 판이 된 것이다. 이것이 정녕 그녀의 운명인가?
“이게 다 인가요?”
“더 도와주고 싶지만, 더 이상 도울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가연은 잠시 침묵 속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심한 듯 이렇게 물었다.
“제가 물어보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해 줄 수 있나요?”
“그러죠.”
그는 흔쾌히 이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당신의 이름은 왜 A맨인가요?”
그는 의외의 질문이라는 듯 잠시 가연을 쳐다보고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3년 전에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용의자로 수배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담당 검사실에서 나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는 뜻으로 A맨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었어요. 어쩌다 보니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겁니다.
가연은 순간 아찔하였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살인사건 용의자라니... 그녀는 용기를 내어 다시 질문을 했다.
“그럼 사람을 죽인 적이 있나요?”
그는 가연의 눈을 쳐다보며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동공이 잠시 떨리더니 약간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살인을 하는 게 꼭 죄가 되는 건 아니에요. 정당한 살인도 있죠. 예를 들면, 부당하게 침략해 온 적국의 군인들도 죽어야 하고, 역사에 역행하는 폭압적인 독재자들도 죽어야 하고, 정당하게 시위하는 시민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경찰들도 죽어야......”
“사람을 죽인 적이 있냐고 물었어요!”
그녀는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이렇게 소리쳤다. 일순간 방 안에 긴장감이 흘렀다. 그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다시 차분하게 대답했다.
“죽이려고 했었죠, 결국 죽이진 못했지만.”
그녀는 긴장이 풀린 듯 안도하더니, 다시 질문을 이었다.
“당신은 왜 저를 도와주는 거죠?”
가연이 이렇게 말하자, 그는 입가에 알듯 말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떻게 보면 교활한 계략을 숨기고 있는 사기꾼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계약 내용을 들어 본적 있나요?”
“괴테의 파우스트요?”
가연은 뜻밖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파우스트는 그녀가 된장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읽었던 고전 문학 작품들 중의 하나였다.
“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내용이잖아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며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해 하며 기다렸다.
“정확한 계약내용은 파우스트가 '순간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포착하게 되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준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메피스토펠레스는 인간이 순간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구원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어요. 결국 교활한 파우스트가 멍청한 메피스토펠레스를 처음부터 이용한 꼴이 된 거죠. 그 계약은 애당초 말이 안 되는 계약인거였죠. 파우스트가 그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순간 신의 영역으로 들어서기 때문에 메피스토펠레스 따위가 건드릴 수는 없었던 겁니다.”
그는 말문을 잠시 멈추고 가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주문을 외듯이 이렇게 말했다.
“영원한 여성성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파우스트에 나오는 마지막 대사였다. 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지금 이 말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그의 눈은 뭔가 모를 확신에 가득 차 있어 보였다.
“나는 당신에게 세상의 모든 정보를 다 알려줄 수 있어요. 대신 당신은 언젠가 당신의 그 여성성으로 나를 이 은둔의 지옥에서 구원해 주는 거죠. 그게 우리 둘 사이의 계약이라고 보면 됩니다.”
가연은 당황스러웠다. 계약, 지옥, 악마, 살인, 이런 단어들을 계속 들으니 눈앞에 있는 남자가 어쩌면 정신분열증이나 과대망상증 환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면, 정말 악마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녀는 서둘러서 밖으로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난 몇 달 동안 가슴 속 깊은 한 구석을 짓눌러 오던 의혹 한 가지를 풀고 싶었다. 혹시 이 사람이 답을 줄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어요. 제 인생은 언제쯤에 확신에 찰 수 있을까요? 캄캄한 동굴을 지나는 이 기분이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제 앞가림도 못하고 있는데, 당신 말대로 제가 당신을 구원할 수 있기는 한가요?”
그는 질문을 듣고 잠시 동안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는 듯이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앞으로 3~4개월 정도 후에, 아마도 10월 26일을 전후한 어느 날이겠죠. 당신에게는 기회가 찾아올 겁니다. 100%는 아니지만, 여신이 될 수 있는 기회죠.”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이 낄낄대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여신? 무슨 여신이요? 만약에 그게 안 되면요?"
“그렇게 안 되면 평생 그 끝 모를 동굴을 헤매야 되겠죠. 두려움과 불안은 죽는 날까지 계속 될 겁니다.”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의 가연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성공한다면, 당신을 시작으로 이 땅에 당신과 같은 여신들 일만 명이 연쇄적으로 나타나게 될 겁니다. 하하하, 천국의 군대가 따로 없지. 그들이 나는 물론이고, 내 주변사람들 모두, 그리고 인류 전체를 구원하게 되죠.”
그의 얼굴은 들떠 있었다. 정말로 가연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고 굳게 믿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가연의 마음속에서는 혼란만 커갈 뿐이었다.
가연은 밀려오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그에게 서둘러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도망치듯이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밖은 아직까지 캄캄한 밤이었다.
“미친 사람같애, 피코.”
그녀는 산길을 내려오며 혼잣말처럼 이렇게 얘기하더니 작정한 듯 피코에게 물었다.
“피코, 어떻게 생각해? 나 혜라의 왕국에서 일해야 할까?”
하지만, 피코는 질문을 못들은 듯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 ‘딩동’하는 알림소리를 내며 먼저 이렇게 대답했다.
‘피코방정식 연산이 완료되었습니다. 요청하신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만약 주인님께서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녀는 메세지를 읽고 잠시 생각에 빠지며 오른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손에는 아까 전에 챙긴 포스트잇이 쥐어져 있었다.
<제10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