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설 연재를 시작하며
제1화 10월 26일 오후 3시
제2화 1년전 10월 26일, 운명의 시작
제3화 덫에 걸린 네 남자
제4화 그래, 나 된장녀다!
제5화 빠릿빠릿한 놈
제6화 한국에서 패션녀 되기
제7화 탈출 작전
제8화 황제노래방 습격사건
제9화 여우와 늑대의 머리싸움
제10화 예언자 A맨
제11화 최종 점검
제12화 혜라의 무너진 왕국
제13화 작전 개시
제14화 피코방정식
제15화 임무 완료
제16화 어설픈 파티는 끝났다
제17화 네가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제18화 10월 26일 저녁 7시(완결) 


                    <경국(驚國)된장 홍가연>


                                                                                                         제작 : 앤디킴
                                                                                                         원작 : 앤디킴


제16화: 어설픈 파티는 끝났다


- 1주일 전 -   

  아침이 되자 간밤에 마신 술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가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가던 중에 그릇들로 어질러져 있는 싱크대 위를 쳐다보았다. 피코가 떠난 지금은 아무도 대신 청소해 줄 사람이 없었다. 어지럽고 지저분하고 산만한 모습이 현재 가연의 상태를 반영해 주는 것 같았다.

  ‘내가 이제까지 한 짓이 결국 이런 것인가?’

  가연은 우울해졌다. 평범한 여대생으로 살다가 적당히 취업해서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서 살았다면 이렇게 낮과 밤이 뒤바뀌어 너저분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뭔가에 홀린 듯이 꽂혀서 된장녀가 되겠다고 설치던 자신의 모습이 순간 부끄러워 졌다. 지금의 상황에서 잠시 도망치고 싶고, 숨고 싶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 이제 와서 어떻게 한단 말인가?’

  다 스스로 선택해서 간 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언제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바라던 욕구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난 그냥 내 길을 가련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잠시 흔들리던 마음을 접어버리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켰다. 답답한 마음도, 조금 전까지 들었던 자신에 대한 의심도 한꺼번에 씻겨내려 가는 듯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지난 1년 동안 가연이 변함없이 정진했던 목표는 예뻐진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남자들에게 잘 보인다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아주 강렬한 자기만족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된장녀라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멈추고 싶지가 않았다. 오히려 된장녀가 된다는 것을 아름다움을 쫓는다는 의미로 생각해 왔다. 아름다운 화장, 아름다운 옷차림, 아름다움 몸동작,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 인생의 매 순간순간이 보석처럼 반짝반짝하길 바랐다. 한 번 보면 누구나 부러워하고, 매혹되는, 어쩔 수 없이 경외하게 만드는 그런 아름다움을 발하길 원했다. 그녀에게 된장녀는 그런 의미였다.

  그녀의 이런 결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제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이렇게 계속 간다면 그 길이 결국 최고의 된장녀가 되는 길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지금 이 순간 흔들림 없이 정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 흔들림 없는 정진을 확신하는 그 순간부터 - 그녀는 그 길 위에서 이미 시공을 초월하여 최고의 된장녀인 것이다. 

  그렇다. 그녀는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오른 된장녀였고, 이제 스스로도 그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피코를 만나 맨 처음 다짐했었던 된장녀의 완성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녀가 마신 한 잔이 물이 몸속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며 모든 것이 일순간에 자명해졌다.

  가연은 한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려도 될 것 같았다. 이대로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 그녀는 이미 인간으로서 이루어야 할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것이 끝인가? 그녀는 다시 멍하니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마치 고요의 바다 속에 깊숙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아니 부질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는지 아니면 몇 초가 지났는지 몰랐다. 가연이 정신을 차린 것은 피코의 메시지를 받고서다. 피코는 가연의 핸드폰으로 A맨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다. 


  ‘홍가연씨, 시간이 다가오고 있소. 설마 포기한 건 아니겠지?’

- A맨 -


  곧 이어 다른 이름의 메시지가 더 들어왔다.


  ‘그대가 앞으로 마초 엘리트들을 차례대로 속아낼 바로 그 홍가연이오? 이제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시오.’

- 백운대 도사 -


  ‘역사는 언제나 저 높은 이상을 향해 달려가고, 지금 우리는 홍가연이라는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소. 이 순간 우리는 신과 소통하며 살아 있소.’

- 인수봉 천년초 -


  가연은 이들의 아이디를 얼핏 본 기억이 났다. 예전에 피코가 A맨을 찾을 때, 매칭 순위에서 A맨 다음에 있었던 아이디들인 것 같았다.

  그들의 메시지를 보자 그녀는 언제 어느 때 자신의 생이 끝나더라도 생을 마감하기 전에 삶에 그 어떤 미련과 의혹도 남겨놓지 말아야 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 순간 가연은 머릿속에서 무언가 생각난 듯 곧바로 핸드폰에서 피코의 음성명령 아이콘을 클릭했다. 그리고는 피코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피코, 웹에서 유춘식, 최정남, 박원영이 동시에 잡히는 문서를 모두 검색해줘.”

  얼마 안 있어 피코의 인공지능으로부터 답장이 도착했다.


  ‘총 2건의 텍스트 파일이 있습니다. 주인님 이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확인하시려면 여기를 클릭해주세요.’


  그녀는 핸드폰으로 피코가 보내준 메일을 확인했다. 첫 번째 파일은 예전에 헤라의 왕국의 웨이터 철민이 한 포털에 올린 글을 어느 블로거가 스크랩해 놓은 것이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룸싸롱 웨이터로 일한지 이제 3계월 됐습니다.

오늘 손님들한테 또 맞았습니다. 이런 일 하다보면 다반사로 있는일인데, 자존심이 상합니다. 술집 웨이터가 무슨 자존심이냐고 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기분이 착찹합니다. 이러고 계속 살아야 하는 건지.

우리 가게 손님들 다들 잘나가는 분들입니다. 텔레비젼에 나오는 사람도 여럿봤구요. 대부분 그냥 아가씨들 불러서 잘 놀다 갑니다. 그런데, 유독 진상을 부리는 3인방이 있습니다. 유춘식, 최정남, 박원영 (그냥 실명 까겠습니다) 이 인간들은 술마시면 개가 됩니다. 그리고 제가 동네북인지 저를 가지고 장난을 칩니다. 제가 겉보기에 나이보다 좀 어리숙하고 둔해보이는 건 있습니다.

유춘식은 가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 국회의원 유춘식입니다. 저만 보면 머리를 때립니다. 처음에는 그냥 장난으로 그러는가 보다 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서는 항상 웃어넘깁니다. 그런데 한두번도 아니고 매일 그러니까 동네개가 된 느낌입니다. 이제는 쟁반으로도 맞고 오징어로도 맞습니다. 표정에서 정말 저를 개취급하더군요. 기분 더럽습니다.

최정남은 장군이라고 하더군요. 이 사람은 무슨 조폭 두목같습니다. 웨이터들도 물론 같이 온 부하인지 일행들도 마구 패더군요. 쫌만 맘에 안들면 그 자리에서 머리박게 합니다. 저는 머리박은채로 재떨이로 맞아봤습니다. 머리통 30바늘 께맸구요. 경찰에 신고도 생각했는데, 소용없을 것같더라구요. 그래도 부관이 다음날에 병원비 주고 팁이라고 10만원도 챙겨주더군요.

박원영은 대학교수인데, 겉모습은 점잔고 신사 같습니다. 목소리도 좋습니다. 그런데, 제일 음흉하고 치사한 인간입니다. 자기가 사람 절대 안때립니다. 꼭 밑에 제자들이 행동대장처럼 나서서 해결합니다. 처음에는 그 제자들이 문제있는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만보면 그게 아니더구요. 문제는 자기가 다만들어놓고 자기는 쏙빠져서 고상하게 앉아서 구경하는 식이죠. 주로 아가씨 터치하는거 때문에 올때마다 말썽을 부립니다. 그때마다 제자들이 그 아가씨를 때리거나 말리는 웨이터들을 때립니다.

이 세팀중 하나라도 오는 날은 재수 옴붙은 날인데, 오늘은 세 팀이 연달아 다 왔더군요. 테이블마다 돌아가면서 수모를 당했습니다. 정말 비참합니다.

제 나이가 적은 편이 아니라 사실 웨이터 시작할때도 걱정이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일줄은 몰랐네요.

이 사람들한테는 팁 안받아도 좋으니 한 번이라도 사람대접을 받아 봤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파일은 어느 연구소에서 올라온 정책세미나 공지 글이었다. 

<한반도 전시작전권 이양 연기를 위한 정책 세미나>

 

 일시: 10월 26일 오후 3시

 장소: 서울 00호텔 2층 그랜드볼룸

 

  - 제1세션 (3:00) : 한반도 안보현황과 우리의 대응태세

       기조연설 : 유춘식(국회의원)

       발 제 자 : 최정남(국방부)

       토 론 자 : 박원영 교수

 

  - Coffee Break (4:30-4:45)

 

  - 제2세션 (4:45) : 전시작전권 연기를 위한 과제

       기조연설 : .........



  그녀는 두 번째 파일을 유심히 보면서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10월 26일......? A맨, 이게 당신이 말한 그 날인가?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지?”

  그러더니 잠시 뒤 뭔가 생각 난 듯이 살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셋 다 정신 좀 바짝 들게 해줄까?”


  그때였다. 가연의 핸드폰 벨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현주였다. 그녀는 가연이 전화를 받자마자 이렇게 소리쳤다.

  “언니”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연은 직감적으로 좋은 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소리에 최근 그녀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흥분이 절제되어 있었다.

  “너 무슨 좋은 일 있구나?”

  “어, 어떻게 알았어?”

  현주는 신기하다는 듯이 이렇게 얘기했다.

  가연은 웃으면서 현주를 한 번 더 놀래켜 주었다.

  “혹시 스카우트에 관한 거야?”

  “어머, 언니 그걸 어떻게 알았어? 벌써 누구한테 들은 거야?”

  현주는 정말 깜짝 놀란 듯이 소리쳤다. 

  “아니, 그냥 직감이야.”

  가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다. 그냥 직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 미국의 달러공급 정책이 인플레이션까지 유발시킬 정도로 국내 경기를 일시적으로 상승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여파로 강남일대에서 고급 술집을 찾는 손님들이 더 많아졌고, 이번 달에만도 텐프로 업소가 2개 더 생겼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언니 진짜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현주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듯 이렇게 말했다.

  “어디서 스카우트 제의했는데?”

  “나 텐프로로 옮기게 됐어. 어제 가게에서 봤던 그 조 상무란 분이 사실 이쪽 일 하시는 분이었어. 월급 1000만원으로 얘기하고 가기로 했어. 조금 전에 츄라이 보고 오는 길인데, 마이킹(선불금의 일종, 텐프로의 경우 무이자)도 1억이나 해주셨어.”

  현주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감격에 겨웠던지 끝에 가서는 목이 메어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자신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한꺼번에 북받쳐 밀려오기도 했고, 기쁨의 눈물이기도 했다. 

  현주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 가연도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축하해! 인생역전이다, 야.”

  그녀도 어느새 울먹이는 목소리로 함께 기뻐해 주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 난 듯이 말을 이었다.

  “우리 또 파티할까?”

  “언니, 또?”

  “어, 다음 주에 호텔에서 하자.”

  “응? 호텔?”

  “그래, 10월 26일로 예약해 놓을게.” 


                                                                                                         <제16화 끝>



                                                                                                          
Posted by Andy Kim